변호사 개업 후에도 슬롯머신 조폭들에게 지속적으로 협박을 당하면서 정계 입문을 고려했다고. 그의 말로는 원래 이기택 대표의 민주당에 입당해 강남 을 지역구 공천을 받으려 했는데 이기택 총재가 왠지 꾸물거렸다고 한다. 김대중국민회의에서도 영입 제의가 있었지만 고사하고 있던 차에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과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전화로 영입을 제의하면서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홍준표 또한 이명박, 노무현, 김무성, 이회창, 이인제, 김문수, 손학규 등과 같은 YS 키즈 중 하나

이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선거구에 출마해 현역 국회의원인 조순환을 꺾고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젊은 나이로 주로 소장파 역할을 맡았으며, 노동 최저 연령 상향을 발의, 통과시키는 등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1999년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검찰은 홍 당시 의원이 동협의회 총무에게 2,400여만 원의 선거운동비를 주고 허위 지출보고서를 제출한 혐의에 대해 ‘불기소처분’(1996년 10월)을 내렸지만, 이듬해 1997년 2월21일 법원은 야당 측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였다. 결국 1999년 3월9일 대법원은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고, 홍 당시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했다.

 

 

하지만 2년 뒤 치러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보궐선거[24]에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하였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3남 김홍걸의 미국 은행 입출금 내역을 공개해 3달 동안 23만 달러, 1달 평균 8,700만원을 소비한 사실을 폭로하였고 검찰이 이를 수사해 최규선에게 3억 원을 수수한 혐의를 적발함으로서 김대중 정권의 최규선 게이트를 파헤치는데 공로하였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탄핵 역풍을 뚫고 서울 동북권에서 홀로 살아남으면서 보수정당의 몇 안되는 서울 다선 의원으로서 단숨에 거물급으로 부상하였다.


2005년에 고위공직자, 사회지도층 및 원정출산자에 대한 병역기피를 막기 위해 국적법을 발의했다. 속지주의를 택한 국가에서 태어나 이중국적을 유지한 채  병역을 이행할 연령이 되면 국적을 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취지로서 병역을 마치기 전에는 국적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곧 국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이어졌고 당시 보건복지부 김근태 장관에게 큰 칭찬과 격려를 받기도 했다. 홍준표 의원의 '국적법'에 네티즌 초당적 열광

또한 그 즈음 민주노동당 소속 조승수 의원이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공식 선거운동 하루 전 지역구 주민집회에 참석하여 간단한 서명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억울하게 의원직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조승수 의원 살리기"를 위한 대법원 탄원서 서명에 동참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 가운데 총 11명이 이 서명에 뜻을 모았는데 여기에는 의외로 극우보수의 아이콘인 김용갑 의원과 현재 바른정당 소속의 주호영 의원도 동참하여 훈훈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놓고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던 상황이라 더더욱 신선한 충격을 줬으나 안타깝게도 조승수 의원은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하고 만다.

2005년 7월에는 당시 들끓는 부동산 시장의 현실을 감안하여 1인당 주택 1채만을 보유할 수 있게끔 하는  법 제정을 구상하기도 했다. 헌법 제37조 2항을 들며 "사회적 해악인 부동산 투기를 막자는 것은 '공공복리'이므로 이를 이유로 주택 소유도 제한할 수 있다"는 취지였고 당시 정부 여당에 입법을 공개제안 했으나 실제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홍준표 "1인당 1채만... 주택소유 제한해야"

2006년에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특별시장의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막판에 오세훈에게 밀려서 석패했다.

 

참여정부 시절 동안 노무현의 저격수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을 지속적으로 음해하고 공격했다. 심지어는 퇴임 후에도 노무현 대통령이 아방궁을 지어 놓고 산다고 비하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4위로 고배를 마시고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범 친이계가 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 열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4선 의원이 되었고 곧바로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추대되면서 이명박 정부 초기의 입법을 주도하였다.

 



2010년 4월에는 사회취약계층의 대학 등록금을 차등하는 법안을 발의했고, 얼마 후 한나라당 서민정책특별위원장을 맡아서는 사채업계의 대출 최고 이자율을 연 25~30% 수준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혀 제2금융권대부업체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후, 민주당 손학규 대표에 맞서서 한나라당의 지지세를 조금씩 회복하였다. 그러나 하필 취임 한달만에 그놈의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중단 주민투표를 한나라당과 협의도 없이 강행해버리면서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홍준표는 당대표지만 당권을 확실히 쥐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다소 야권에 유리하게 흘러가는 정국을 수세적으로 지켜야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과 상의도 없이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중단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어버리는 독단적인 행동을 막으려고 어떻게든 시도했지만 오세훈은 결국 주민투표 무효와 함께 서울시장직을 던져버렸고 25.7%가 나왔으니 사실상 승리라는 홍준표의 쉴드는 조롱거리만 되고 말았다. 이때문에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는 사실상 미니 대선급 대형 선거가 되어버렸고, 무상급식 어젠다때문에 야권에 주도권을 뺏겨버린 한나라당은 나경원 후보를 내세워 서울시장직 탈환을 노렸지만, 안철수 당시 안랩 의장의 정치참여라는 핵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그 안철수가 박원순 당시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고, 그 힘으로 민주당과의 야권 단일화를 통해 야권 통합후보가 되었고, 결국 서울시장 자리를 9년만에, 지방선거에서 간신히 승리한지 채 2년도 지나기 전에 민주당에 뺏겨버리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2011년 11월 22일 한미 FTA를 비준안을 통과시킨 장본인이다. 참고로 2017년 4월 28일에 있었던 제19대 대통령 선거 2차 TV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가 한미 FTA를 자신들이 체결했다고 주장했는데, 협상 자체의 체결은 참여정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맞지만 한미 FTA의 완결과 실질적 발효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나라당이 체결한 것이 맞다. 팩트체크 당시 당 대표였던 홍준표가 매국노, 을사늑약 소리를 들으며 표결 처리했고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은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는 불상사를 저질렀다. 홍준표 "한미FTA 비준 더이상 늦추면 공멸"

 

이 FTA 체결이 있기 3주 전인 11월 2일 tvN끝장토론에 출연해서 한미 FTA를 반대하는 대학생들과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젊은이들에게 혼나러 나왔다"며 FTA를 포함한 여러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공격을 들어오는 학생들을 상대로 전혀 꼰대답지 않게 반박과 주장을 펼쳤고 인사청문회의 한계, 한나라당이 친기업 정책을 펼친 것과 육아/출산 문제에 대한 실책은 순순히 인정했다.

2011년 12월 “현역의원 전원의 불출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자기희생적이고 과감한 인재영입을 추진하겠다.” “현역의원과 당협위원장은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선수에 상관없이 의정활동과 조직활동으로 전원 재심사를 받도록 하겠다.” “재심사위원회는 전원 당외 인사로 구성해 공천심사위에 가기 전에 2단계로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재창당 쇄신안을 내놓은 것. 그러한 쇄신안이 당내 모든 계파로부터 거부 당하자 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 물론 이것은 이미 끝난 마당에 던진 수로 실제로는 재보궐선거 패배의 책임으로 일찌감치 당 지도력을 상실해 사퇴론이 불거진데다, 설상가상으로 재보궐선거때 터진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으로 특검까지 실시되는 등 한나라당의 선거부정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사퇴를 거부하면서 버티다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12월 9일 재임 5개월 만에 사퇴하고, 박근혜 비대위 체제로 가게된다. 그리고 박근혜 비대위 체제에서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홍준표는 한나라당의 마지막 당대표가 된다.

 

이 즈음에 뜬금없이 강용석의 SNS에 언급당하게 되는데 "나약하고 무기력한 보수 세력과 내부분열 속에서 자기 희생만 강요하는 새누리당의 최근 행태를 보면서 답답하고 화가 났다"며 취중에 멘션을 날린 것이라 고백했다(...) 이에 홍준표는 "무지랭이 부모덕에 내가 있다"며 답을 보냈다.

당대표에서 낙마한 뒤 4개월이 지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동대문을에 출마하였으나 민병두 후보에게 밀려 석패하였다. 훗날 밝히기로는 자신은 원래 19대 총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었는데 당에서 동대문을에 자신을 전략공천시켰다고 한다. 보수정당이 굉장히 어려운 열세지역이었기 때문에 출마할 사람이 자기밖에 없었기 때문. 홍준표는 자신의 낙선을 예감하고 이때 동대문을 지역주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명박의 실정에 분노한 서울 민심 때문에 당초에 선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지지율이 밀리는 양상을 보였고, 그것이 당연히 패배의 결과로 이어진 것. 어쨌든 앵그리 버드를 패러디하는 동영상도 찍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홍준표를 지켜본 수많은 정치인들은 이것으로 홍준표의 중앙정치 생명은 완전히 끝났다고 평가했다.

 

총선에서 패배한 후 몇 달 동안 야인생활을 하다가 김두관 경남지사가 사퇴하여 경상남도 도지사 자리가 공석이 되자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경상남도 도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거기서 야권의 권영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재기했다. 이후 2014년 6월,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김경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19대 대선 자유한국당 후보가 되면서 사퇴하기까지 재임하였다.

홍준표 지사 취임 이후 3년 6개월 동안 매일 11억 원씩 총 1조 4천억 원의 채무를 도내 재정 하나 건드리지 않고 행정개혁만으로 청산을 완료하면서 전국 최초의 흑자 광역지자체가 되었다. 또한 대한상공회의소에서 2년 연속으로 가장 기업하기 좋은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사천시, 진주시의 항공우주산업단지, 밀양시의 나노산업단지, 거제시의 해양플랜트산업단지 등 3개의 국가산업단지를 유치하였으며 2012년 15위, 2013년 14위 등 만년 최하위권에 머물던 도의 청렴도가 2014년에 3위로 수직 상승해 2015년 2위, 2016년에는 전국 1위를 차지하는 등 성공적인 도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이력 덕분에 한때는 차기 대선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 무상 급식 중단, 각종 막말 등 갖가지 논란으로 인해 2015년 이후 여론에서 대하는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며, 대권은 사실상 멀어졌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지역 여론도 좋지 않은 편이라 사실상 탄핵에 상응하는 주민소환까지 고려되고 있으며, 현재 ‘홍준표 경남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의 주도로 주민소환투표를 청구하는 서명을 받아 선관위에게 심의를 요청한 상태이다. 주민소환은 경남 총 유권자의 10%인 27만명을 넘으면 홍준표의 소명을 받아 실시가 되는데 현재 신청 서명한 사람이 35만명이기 때문에 유력하다. 선관위에 의해 투표 공고가 나오면 투표일까지 직위는 중단된다. 이후 투표가 진행되면 총 유권자의 1/3이 투표한 가운데 과반수를 차지하면 직무가 해제된다. 만약, 해제가 되면 내년 4월 재보궐로 새로운 도지사를 뽑게 된다.# 다만 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시점이기에, 실제 주민소환이 이뤄지기 위해선 중복서명 검사 등의 필요한 절차들을 밟기 어려운 상황으로, 총선이 끝난뒤에 명단 검토 및 주민소환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경남지사 시절의 각종 논란 및 성완종 리스트 연루로 대권이 사실상 멀어진 것처럼 보였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어 자유한국당의 지지도가 동반 폭락하고 바른정당과 분당 사태를 겪으면서 당 내 대권주자 라인업이 극도로 초라해지게 되자, 난립하는 당 내 경선 군소 후보들 사이에서 홍준표가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얻게 되었다.

2017년 3월 31일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전당대회에서 총 득표율 54.2%를 기록하며 이인제, 김진태, 김관용 후보 간의 경합에서 승리,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아무래도 대선후보 전당대회 참가자들은 박근혜를 끝까지 뒤따르려는 김진태보다 박근혜와의 단절을 선언해[30] 민심을 얻으려는 홍준표 쪽이 살아남는 길이라 판단했다.

단일화에 대해서는 바른정당에게 다시 힘을 합치자고 권유했으며, 국민의당과의 단일화는 조금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홍준표가 후보가 되고 난 후 바른정당과의 범 보수 단일화는 되레 멀어졌다. 홍준표가 후보가 된 후 그는 친박은 없다며 오히려 친박 인사들을 적극 등용했다. 또한, 바른정당을 향해 아무조건 없이 백기투항하라는 말을 하는가 하면, 대구경북 지역 사람들은 살인자는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여 유승민바른정당을 오히려 더 자극했다. 유승민도 홍준표에 대해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며 무자격 후보라고 주장했고, 비진박이지만 친박의 지원을 받아 후보가 된 홍준표와 단일화할 수 없다며 서로가 대립했다. 그래서, 19대 대선에서 보수 후보 단일화는 사실상 물건너 간 것이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을 정도다.

홍준표가 주장하는 노태우 모델이 실제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바른정당 후보인 유승민과 단일화했어야 한다. 하지만 바른정당과의 통합은 유승민김무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강성 친박계의 반발을 사 시너지 효과는커녕 자유한국당 지지 기반이 날아가버린다는 딜레마에 휩싸였다. 실제로 자유한국당 내에서는 김진태, 이우현, 이인제, 최경환바른정당과의 연대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의원들과 당원들이 많다.

바른정당 입장에서도 당시 새누리당 내에 만연한 친박 패권주의를 대차게 까면서 탈당했는데, 홍준표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면 바른정당을 창당했던 명분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꼴이다. 또한, 국민의당과의 연대에 대해서도 4월에는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자신에게 단일화 압박이 가해지자 국민의당은 민주당 2중대에 불과하다면서 단일화의 뜻이 전혀 없음을 공고히 하기도 했다.




4월 6일에는 홍준표 "안철수 찍으면 박지원이 상왕…安 각본에 춤추는 인형"이라며 이미 돌이킬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결론적으로 홍준표는 외연 확대를 위해서는 친박을 버려야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기 집토끼를 잃게 되는 한마디로 진퇴양난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성 친박계 정치인 중 하나인 조원진 의원이 탈당하여 친박단체가 창당한 새누리당에 합류하여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집토끼인 강성 친박 지지세력을 지키기도 어렵게 되었다.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그동안 친박단체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김진태, 조원진, 박대출 의원같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으며, 강성 친박 세력도 청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을 제지하면 집토끼인 강성 친박 지지세력의 이탈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원진자유한국당을 탈당하면서 자유한국당과 홍준표 후보는 탄핵을 찬성하는 보수 세력은 물론이거니와 반대하는 보수세력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고사당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홍준표 후보는 이제 어느 쪽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대선 공약으로 10차 개헌에 대해서 4년 중임의 분권형 대통령제를 정부 형태로 제시했다. 행정수도를 세종특별자치시로 옮기는 내용도 내놓았다.

나라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겠다는 표현을 두고 토론회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설전 중 "내 세탁기는 삼성세탁기" 드립을 치면서 빈축을 샀다. 여기에 살균세탁 하셨나요 드립과 엮여서 이런 것도 나왔다. 거기에 하필, 삼성 세탁기가 미국 뉴저지 주에서 폭발사고가 난 적이 있어서 불량 세탁기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4월 15일 유세 도중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진실 여부는 우리가 이기면 바꿀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하였으며 그의 부인도 친박집회에 참여한 점을 보아 친박 표를 얻어가려는 것으로 보였다. 헌법재판소가 인민재판을 했다느니 좌파 1중대(문재인)보다 2중대(안철수)가 더 무섭다느니 하는 발언을 보면 논란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발언하는 것과 관련하여 선거자금 보전과 관련되어 있다는 해석이 제기되었다. 즉, 현행 선거법상 15% 이상을 득표해야 선거자금을 전액 보전받을 수 있고[34] 박근혜 탄핵에 반대했던 보수층은 15~20% 정도 되는데 이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는 외연 확장을 못하는 발언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발언해야지만 이들의 표를 획득하여 15% 득표율을 달성해 선거비용을 보전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것이었다

다만 친박 강성세력도 자유한국당 세력, 새누리당 조원진 세력, 남재준 세력으로 분산된 상황이라 과연 15%를 온전히 득표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았다. 홍준표가 10%도 거두지 못할 가능성도 제기되었데, 만약에 진짜로 그랬으면 자유한국당도 경제적으로 파산하는 거지만 홍준표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19대 대선 이후

 

홍준표는 자유한국당에서도 자신을 따르는 계파 의원이 정치 커리어 내내 단 1명도 없는 비주류에 속하는 인물이고, 보수정당 역사상 대선에서 최악의 참패를 당한 후보이기 때문에[35] 여전히 의원 수와 조직세가 건재한 친박계가 다수인 자유한국당 내 당권 쟁탈 승리를 위해서 매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인은 4월에 당권에 도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대선 다음 날인 2017년 5월 10일, 홍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이 나를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또한 "남은 세월이 창창하다"고 사실상 와신상담을 선언했다.기사 그 첫 행보로 보수 대통합의 적자로서 당 내 개혁에 뜻을 비추었다. 먼저 문재인 정부의 내각이 갖추어질 1~2달 동안 미국에서 가족들과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전당대회에서 자유한국당 대표로 출마할 가능성이 유력하다.

항간에 2018년 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출마설이 제기되었지만 고사한 듯하다. 현재 안철수의 사퇴로 공석이 된 노원구 병 선거구 국회의원 출마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 역시 고사한 듯하다. 또 현재 재판 중인 국민의당 최명길 의원이 당선 무효로 판결되면 송파구 을 재보궐선거에 나갈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38][39], 2017년 현재 더불어민주당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에서는 어딜 나가든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노원구 병 지역구는 호남 출신 인구가 많아서 현재 여권인 더불어민주당에 크게 유리한 것은 물론,[40][41] 희대의 국정농단 사건 때문에 보수정당에 대한 민심 이반이 워낙 심각해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할 것이 뻔하다. 다른 지역인 송파구 을은 새누리당계 정당이 몇 번 승리를 거둔 지역이지만, 여기서도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장 2016 총선을 보아도 보수정당 불패일 줄 알았던 강남권마저 더불어민주당에 꽤 빼앗겼으며, 대선에서도 강남권은 더불어민주당에게 초토화됐다.

 

미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 인터뷰에서는, 조국 민정수석을 향해 "조국인지 파국인지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일단 사퇴하는 것이 맞다."며 언급했다.[44] 이어서 "더불어민주당 마음대로 하게 놔 두지 않겠다.", "이미 10년 야당을 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강력한 제1야당을 구축해서 이 정부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국민을 위해서 철저히 견제하겠다", "내가 싸움에는 천재다"라며 문재인 정부의 출범에 형식적으로나마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는 야당들과는 달리 더불어민주당과의 지속적인 충돌을 예고하며 사실상 정치적 선전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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