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법조인, 정치인. 4선 국회의원당 대표, 35, 36대 경상남도 도지사를 지냈다.[12] 경남 창녕군 출신에 경남도지사까지 역임했지만 정치적으로 TK 계열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많다. 본인도 스스로 TK의 성골은 아니라도 진골은 된다며 어물쩍 넘어가긴 한다. 경남 출신이지만 중/고등학교를 대구시에서 다니며 성향과 인맥이 형성된 전두환(경남 합천군)과 비슷한 케이스.

그러나 검사가 된 뒤부터 그는 언제나 아웃사이더였다. 경기고, 경북고, 서울대 법학과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세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정치권과 달라붙은 조직폭력배를 소탕하고, 박철언을 비롯한 여러 거물까지 법정에 넘긴 덕분에, 깨끗한 이미지로 이름을 날린다. 물론 상부에서는 그를 아니꼬워했고, 결국 홍준표는 법복을 벗었다. 그 뒤 김영삼의 영입제의로 정치인으로서 새 삶을 시작했지만 역시 당내 주류와는 늘 거리가 멀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한테 형님 소리도 하고 BBK도 막아줬건만 법무부장관 청탁을 3번이나 거절당하는 등 친이계도 아니며, 그렇다고 친박으로도 분류되지도 않는다. 스스로 "자존심 하나로 사는데, 아바타 정치는 안 한다"라고 공공연히 말한 적도 많다

 

 


1954년 12월 5일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태어났다. 원래 본명은 홍판표. 그의 아버지는 얼굴도 호남형에 덩치도 크고 힘이 장사였지만 무학에다 소작농으로 경제적으로 무능할 수 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어머니가 고리 사채꾼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다니며 곤욕을 치른 적도 있을 정도로 집안이 어려웠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창녕군합천군 등지를 전전했다. 초등학교 때 6군데나 전학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귈 수 없어 공부에만 전념했다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했고 어느 초등학교에서도 '압도적인' 1등. 하지만 어린 시절 영양 부실로 성인이 돼서까지 몸이 야위었고, 초등학교 졸업 당시 키가 124cm에 불과할 정도로 왜소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해, 고향 중학교가 아닌 대구시 영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숙식은 대구 직물 공장에 취직한 누나 방에 얹혀 살며 해결하기로 했다. 억수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아버지와 8km를 걸어 대구행 버스를 탔는데, 그날따라 무거운 지게를 진 아버지 뒤에서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엄마가 정말 어렵게 주신 용돈을 다시 되돌려 줬을 정도로 속깊은 데가 있었다. 이제 대구 대명동 사글세방에서 누나들이 싸주는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공부했다. 그나마 도시락도 없이 혼자 운동장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



홍준표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결국 대구시로 이사왔다.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셋방 단칸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사과 행상을,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하루 4~5시간만 자고 공부해 영남중학교에서도 1등은 그의 차지였다. 그러나 당시 대구 경북 일류 명문 경북고등학교가 아닌 영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경북고는 장학금을 안 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교 진학이 지금처럼 배정가 아니었고, 역사도 당시 20년 정도로 짧았던 영남고는, 훗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삼류고 취급이라 가기만 한다면 그의 1등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경북 일류 명문 경북고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본인에게 컴플렉스였고, 출세에도 핸디캡이 됐다. 심지어는 대학 첫 소개팅 자리에 이대생이 나왔는데 여기저기 자신을 뜯어보던 그녀가 집이 어디냐, 대구다, 그럼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냐, 영남고다 그랬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이후로 대학 때 미팅 종류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밑에 첨부된 그의 대학시절 사진만 보더라도, 그의 지인들은 당시 홍준표 하면 그가 늘 신던 검정 고무신을 떠올리곤 한다. 소개팅녀의 행동이 혹시 영남고 때문이 아니라 그의 패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어쨌든 그는 출신고를 묻는 그녀에게 순간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인 거 같다.

그는 커리어에서 평생 아웃사이더 또는 비주류를 자처했는데 그 원인으로 출신고에 대한 열등감, 서울대가 아닌 열등감, 자신의 가난했던 출신, 단기 사병 복무 등을 꼽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장래 희망에 학비가 안드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꿈을 품었었다. 어느 날 대구 토박이가 아닌 아버지가 시장통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힘없는 이들을 돕는 검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원래 공부를 잘했지만 1달 여 벼락치기 신공을 더해 1972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역대 졸업생 최초로 고려대에 합격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가 됐다.

 

대학 시절 땐 공부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5층 여관집에 출퇴근 가정교사를 하면서 1살 많은 제자의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고연전 축제조차 딱 한 번 갈 정도로 바빴다. 그 와중에도 2학년 때인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선후배들과 중지를 모아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처음 낼 만큼 정의감이 강했었다. 때문에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고. 대학은 어떻게든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시국 행동은 못했다. 강희락 경찰청장, 주상용 서울경찰청장, 이승재 해양경찰청장, 김성곤 의원,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등이 고려대학교 동기다.

 

그의 진학 후 더 이상 대구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진 가족들은 부친이 현대조선소의 경비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울산으로 옮겨갔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어느 겨울 밤,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가 목욕탕에나 봄직한 플라스틱 샤워의자에 앉아 칼바람 부는 바닷가 모래밭에 불을 쬐고 있던 모습을 봤는데, 그 때 "불공평한 세상 한 번 바꿔보자"고 다시금 결심했다. 그 해 아버지는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도 한 번 못가 여지껏 병명조차 모른다고. 심지어 운명 직전 "병명이나 알고 죽자"고까지 했단다.  부친이 병원에 갈 수 없었던 이유는 가난, 아들의 등록금을 걱정한 어머님의 반대, 그리고 부친 당신이 희생을 감수한 때문이었다.

그 역시도 "세상이 디비졌으면.."하는 생각을 지닌 운동권이었고 박정희 유신반대 학생운동을 하며 총학생회 지하유인물을 작성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엄청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문제적 인간, 홍준표 그러나 더 이상 강성으로 나가지는 않았고 성북경찰서에서 풀려나자 마자 고시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간다.

사법시험 도전은 번번히 실패했다. 72학번인 그가 6년이나 병역도 미루고 졸업도 미뤄가면서 고시 생활을 이어가던 중, 고려대학교 구내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16]에서 일하던 여자 은행원 이순삼에게 반했다.(당시 이순삼은 21세) '전전반측 잠못 이룰 정도였다'고 그도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숫기는 물론 땡전 한푼 역시 없었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그녀에게 말을 걸고는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나와 앞으로 살 생각이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그 여인은 정말로 도서관으로 찾아왔고  홍준표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전북 군산의 장인 장모될 분들을 만나러 둘이 내려가서는 인사를 드렸는데, 홍준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장인은 뒤에서 딸에게 "그거 구름잡는 놈이다. 택도 아닌 놈이다. 그런 놈이 고시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고. 장모는 "사람 착해 보이니 잘 해봐라" 그랬다며, "어떠셨대??" 하고 묻는 그에게 이순삼이 솔직히 털어놨단다. 그 덕에 "장모는 혹 용돈을 드려도, 장인어른은 용돈은커녕 26년 간 내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고 훗날 2017년 자유한국당 후보 군산 유세에서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가 홍준표는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신접 살림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 7동 지하 단칸 셋방이었다. 그 뒤에도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그래서 군대에 끌려가게 됐다. 당시 몸무게가 48kg으로 워낙 말랐기 때문에, 체중미달로 14개월의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여담이지만 몸이 약해 단기 복무한 데에 컴플렉스가 있던 그는 평소 해병의 단결력에 대해 굉장히 부러움을 가졌다고. 해병대에 호감을 자주 표한 바 있으며 그의 차남도 해병대 출신이다. 2002년 해병대를 중심으로 한 특수군 신설 법제화에 힘쓴 공이 인정돼 명예 해병에 위촉되기까지 했다. 어쨌든 복무장소는 처가가 있던 전라북도 부안군의 해안초소였다.

그렇게 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그리고 아내의 5년에 걸친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29살인 1982년 드디어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바로 아내와 정식 혼례를 올렸다. 맏아들 정석이는 그때 벌써 2살이 되어 있었다.

 

 

1984년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청주지방검찰청에 초임검사로 데뷔했다. 이때 황교안 총리와도 인연을 맺는다.(황교안이 1기 선배) 청주지법 형사단독재판장이던 이주영이 이름도 바꿔줬다. 홍판표의 한자가 ‘판단할 판(判)’인데 사람 이름에 '선칼도방(刂)'이 들어가는 게 좋지 않다며 . 개명을 권했단다. 기린 린(麟)과 평평한 준(準) 두 자 중에 고르랬더니 '준표'가 더 마음에 들었던 모양. 당시만 해도 개명이 어려웠는데 이주영이 법원장에게 힘을 썼다고. 이주영 전 장관 "팽목항 200일, 죄인 된 심정으로 임했다"

1987년 울산지청 검사로 전임됐다. 이때 진주시 남강 골재 무허가 채취와 관련된 사기 사건을 수사하며 단순 경제사범 건이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의 누나 전명렬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임을 포착했다. 홍준표는 전명렬을 기소하기 위해 소환하려 하나 안기부 경남 분실장에 이어 자신의 사수마저 제지해 포기했다. 이때를 회고하는 홍준표는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는 방법을 먼저 연구하자 결심했었다고 한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 후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특수부 검사로 부임했다. 이 때 검거 실적도 꽤 높고 서슬 퍼렇던 군부 독재 시절, 권력 비리까지 연이어 건드리는 등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당시 서정희 치안본부 정보분실장을 구속기소했던 게 눈에 띈다. 서씨는 청와대 비서실 산하 대통령 친인척관리담당관을 겸임중이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돈 회사가 부도나자 회사 부동산을 자기 지위를 이용해 비싼 값으로 대신 처분해 주면서 대금 일부를 횡령한 사실이 적발됐다. 또 전두환의 외조카인 김영도가 구속사건 무마를 청탁받고 뇌물을 수뢰한 사실을 적발해 구속 기소하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 전기환이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 이학봉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통해 서울시, 치안본부, 국세청, 감사원 등을 움직여 노량진 수산시장 경영권을 강탈한 사실을 적발하고 구속 기소했다.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3당 합당에 성공하고 88 올림픽 개최의 열매를 거두는 등 혜택을 봤지만, 상왕 노릇을 하려는 전 대통령의 권력형 비리를 터뜨려 그의 입지를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홍준표는 이런 시세 흐름을 타고 크게 활약했지만, 노량진 수사 건은 당시 노태우 정권의 실세와도 연루되는 등, 자칫 노 정권까지 위험하게 할 우려가 있어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는 사건을 덮으라 지시했다. 그렇지만 홍준표는 이런 권부의 요구를  무시하고 수사를 강행했다. 통제가 안되자 남부지청 특수부에 부임한지 4개월 만에 홍준표를 형사부로 좌천시켰다. 수사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이첩돼 이학봉 전 민정수석과 전기환이 구속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홍준표는 소위 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찍혀 출세길에서 멀어졌다. 원래 명문고 출신도, 서울 법대 출신도 아니라 특수부 발령은 무리였다지만 깨끗한 검사 이미지  로 이름을 알려 엘리트 코스에의 희망이 보였던 홍준표로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당시 검찰 엘리트 코스 중 하나였던 공안 검사를 못해본 건 나중에 정치인으로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볼 수 있겠다.

사설을 덧붙이지면 검찰 내에는 직접 수사 부서가 셋 있는데 특수부, 공안부가 검찰의 꽃이고 강력부까지 3부서가 된다. 경찰을 지휘해 수사하는 일반적인 검찰 수사와 달리 직접 수사를 맡아 하기 때문에 수사 진행도 빠르고 이름을 알리기도 좋다.

 

광주지검 강력부 시절

남부지청 특수부에서 형사부로 좌천된데 이어 1991년엔 아예 광주지검 강력부로 좌천됐다. 홍준표는 낙담하지 않고 곧바로 광주 조폭 국제PJ파 수사에 착수한다. 전년도 1990년 10월 13일 부로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즈음이었다. 5월엔 광주 깡패가 경찰관을 구타한 사건을 강력 처리했고, 7월에는 건설 입찰 대가로 뇌물을 준 건설업체와 연고지역 업체끼리의 담합을 적발했다. 1991년 12월에는 국제 PJ파와 일본 야쿠자의 연대를 포착, 12월 4일 현장을 덮쳐 일망타진하고 32명을 구속시켰다.

서울지검 강력부 시절

광주지검 강력부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2년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검사로 발령됐다. 그는 파키스탄인 폭력조직 주비파 두목 임란 사자드 외 13명을 적발, 체포해 그해 9월 22일 임란 사자드 외 3명에게 사형, 나머지 10명에게는 징역 15년형을 구형했다. 이 사건은 '최초의 외국인 사형구형 사례'로서 각 일간지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이태원을 중심으로 '비키파'와 '주비파'라는 파키스탄 폭력조직이 활동했는데 비키파 조직원이 위조지폐로 귀금속을 사려다 적발되자 주비파 이름을 팔았다. 일명 '주비' 임란은 문제가 커질까봐 귀금속 값을 대신 치루고 비키파를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비파 조직원 일명 고고가 린치를 당해 살해되자 이를 빌미로 비키파 두목 비키(모크테르 아흐메드)와 나나(아흐산 주베르)를 납치해 성남 야산에서 살해한 사건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주비파 조직원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 형을 최종 선고받고 각각 광주 교도소와 안동 교도소에 수감됐다. 조직원 중 셋은 5년형, 나머지 일곱 명은 방면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1996년 가을 문제가 된다. 사형수로 5년 째 복역중이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故 김수환 추기경에게 탄원서를 썼다. 실은 자기들이 한국에 온 지 한 달 밖에 안됐었고 조직원도 아니며, 범행 날짜로 알려진 날은 파키스탄 명절로 취업 브로커도 겸하던 임란을 찾아갔다가 얼떨결에 성남 야산에 같이 있었을 뿐인데 임란이 자기들에게 누명을 씌웠다라는 거였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수사팀이 그나마 한국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임란의 진술에만 의존해 수사했고 통역은 엉터리였으며, 심지어 심문 과정에서 경찰이 각목에 젖은 천을 감아 구타하고, 성기에 전기 고문을 하는 등 13일 간 모진 고문을 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은 고통에 못이겨 자백을 강요당했고, 자신과 조직원을 보호하려는 임란의 거짓 진술에 의해 졸지에 사형수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97년 3월 유엔 인권위원회는 한국 검찰 수사에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 정부 측에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한국 당국은 위원회의 자료 요청에 대해서 희생자 및 증인 보호 등을 위해 해당 종결 사건의 기록에 대한 숙독, 촬영, 무단 반출은 금지했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0.5항)[20]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비록 공판 당시 속기록이 제공되지 않아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없었다는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한국 사법당국에서 보내온 구속기간 중 신체검사내역서 및 통역인들의 증언을 비롯한 각종 자료, 또한 1심과 2심의 판결 모두 고려한 결과, 위원회는 한국의 법체계(jurisprudence)에 따른 1심과 2심의 판결을 받아들이며, 두 사람에 대한 처우 및 판결에 대해 임의적이거나 사법정의가 부정됐다고 여기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4.2항) 동년 5월, 5년 형을 마친 나머지 세 조직원은 강제 출국됐고 사형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98년 2월 자로 종신형으로 감형됐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99년 2월 '주비' 임란 사자드와 삼일절 특사로 사면을 받아 강제추방됐다.

홍준표는 훗날 2017년 4월 27일 서산 유세 때 유력 대선 주자로서 사형제 부활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흉악범은 반드시 사형시켜야 하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도 중요하다가 주요 논지인데, 위험집단과 지속적으로 대립해온 그의 이력이 사형제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불러온 것으로 여겨진다. 사형제는 세계적으로도 뜨거운 논란거리이므로 홍준표가 사형제 부활의 당위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는 향후 지켜보아야 할 듯.

한편, 92년 사건 당시 사형수 두 사람이 소명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나 하는 2017년 미디어투데이의 문제제기도 있는 상태다. 김영삼 정부 마지막 3개월만을 남긴 97년 12월 30일 한꺼번에 사형수 23명이 형집행됐을 당시 두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다. 다만 링크된 기사는 변호사 측 의견만을 기반으로 작성돼 가해자들이 '진범이 아니다'라거나, 유엔 인권위원회의 조사결과와 모순된 그들의 진술을 진실처럼 소개하는 등, 단정적인 태도로 접근한다는 점은 감안하고 판단하길 권한다. 인권위원회의 보고서에는 그들이 주장한 엉터리 통역 가능성에 대해 한국 사법당국이 통역 뿐 아니라 파키스탄 인을 따로 참고인으로 불러 진술 내용을 확인하는 등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고, 고문 주장에 대해서도 사건 종결 전 법정에서 피고와 그 변호인은 고문 등을 입증하지 못했으며 고문 때문에 다쳤다는 귀도 원래 중이염을 앓고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한국 사법체계는 고문자를 엄벌함은 물론 고문으로 인한 자백에 대해 증거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도 보고서에서 다루고 있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0.3)


 


1992년 10월 21일에는 보험금 7억 원을 노리고 자기 지하 나이트클럽에 방화한 목포파 부두목 유희호와 행동대장 홍동표 외 6명을 체포, 구속했다.

 슬롯머신 사건 수사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당시는 사정 한파라 해서 공직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아래 군부 독재 시절의 거악들을 발본색원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홍준표는 슬롯머신 사건을 맡았다. 빠찡코로 더 잘 알려진 슬롯머신의 업계매출은 당시 연 1조 2천억으로서 1조원 수준의 호텔 카지노는 물론 경마마저 능가하는 규모였다. 슬롯머신 업소 대부분은 정덕진 일파에게 장악돼 있었고, 이들은 김태촌의 서방파와 손잡은 정황 및 정관계 유력 인사들마다 로비를 하는 등 거대한 사회악으로 자라있었다.

이들은 코인 한 개에 10만 원을 넘기지 않도록 되어있는 당첨금을 600만 원까지 시상하게 하는가 하면 87%로 규정돼 있던 당첨률도 18% 이하로 조작하는 등 온갖 불법의 온상이었다. 게다가 정치와 유착해 전현직 고위 관료 출신을 주주로 앉혀 검찰의 내사를 중지시키는가 하면, 노태우 정권의 실세에게 접근해 정덕진의 친형을 구속한 검사를 좌천시키고 혐의자를 빼내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홍준표는 탈세 혐의를 일단 씌워 정덕진을 구속시키고 이후 정관계 관계자들을 내사하는 쪽으로 수사 방향을 틀었다. 이 과정에서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냈던 엄삼탁, 천기호 경찰청 치안감, 그리고 대전지방검찰청 모 검사 등의 비리, 뇌물수수혐의등을 입증하고 모두 구속 기소했다. 당시에도 협박과 압력을 많이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처리하였다.

슬롯머신 수사의 절정은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을 구속 기소한 것이었다. 슬롯머신 업자에게서 5억 원의 돈을 받은 혐의를 포착한 것이다. 박철언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원은 박철언의 결백하다는 주장을 외면했다. 결국 박철언은 국회의원 뱃지를 반납하고 1년 4개월 동안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이러한 일화가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알려져 홍준표는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2017년 5월 2일, 모래시계 작가 송지나는 모래시계 검사는 여러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와 여러명의 캐릭터를 조합해서 만든 가공의 인물일 뿐 모래시계 검사가 홍준표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그러나 홍준표 측에서도 곧바로 모래시계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히면서 송지나 작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후 홍준표는 1994년 법무부 특수법령과로 좌천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국가안전기획부에 파견되면서 국제범죄수사지도관이 되었다. 이 시기 안기부 러시아 지부에 주재하면서 러시아 마피아 대책을 세웠고 지금도 그 프로그램 그대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이후 파견근무를 끝내고 법무부 특수법령과로 복귀한 뒤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검찰을 나온 뒤 변호사를 개업하고 방송 출연 등에 섭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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