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음반을 가장 많이 판 여가수
아이돌에서 섹시여가수로 성공한 팝스타의 표본
브리트니는 미시시피에서 태어났고 루이지애나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건설 일을 하는 등 풍족한 집안은 아니었다. 8세에는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키 마우스 클럽 오디션을 봤으나,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이때 눈여겨 본 관계자가 뉴욕에 있는 에이전시를 주선해주면서 뉴욕에 살기 시작했다. 꾸준히 가수가 되기 위해 이곳저곳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오디션 프로그램인 '스타서치'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다만 여기에 출연했을 뿐 우승은 거머쥐지는 못 했다. 이 오디션에서 'Love Can Build A Bridge'를 불렀는데 현재 창법과는 완전히 딴판인 디바형 창법을 구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 그녀가 현재 사용하는 창법은 데뷔 전에 '자이브 레코드' 측에서 요구한 창법으로, 고양이 같은 나른한 창법으로 뜯어 고치면서 섹시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다만 인위적으로 내는 창법이라 음폭과 성량이 한없이 줄어들게 되며, 라이브 역시 힘든 창법이다. 본인도 그걸 알고 퍼포먼스 위주로 활동하는 편이다. 그러나 2013년 발매된 앨범 <Britney Jean>의 수록곡 'Perfume'에서 자신의 원래 창법을 선보여 전문가들과 팬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얻었다. 다만 홍보 활동의 부재로 큰 화제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여러 광고 제의도 들어왔고, 1992년 어렸을 적부터 고대하던 미키 마우스 클럽에 선발되었다. 첫 데뷔 연도가 1993년으로 기록되는 이유가 있다. 이때 같이 선발된 사람이 엔싱크 리더이자 브리트니의 첫 남친이었던 저스틴 팀버레이크. 당시 미키 마우스 클럽은 스타들의 등용문으로도 유명했는데 브리트니가 캐스팅되고 나서 2년만에 프로그램이 폐지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지내다가 1997년 5인조 걸 그룹 이노센스로 데뷔하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세계적인 레코드사인 '자이브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고 데뷔를 준비했다. 당시 '자이브 레코드'도 브리트니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기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줬다.
1998년 데뷔 싱글 '...Baby One More Time'을 발매했다. 미국을 포함해 세계 주요 국가 1위를 모두 석권하며 뉴밀레니엄 대스타의 탄생을 알렸다. '...Baby One More Time'의 뮤직비디오가 당시 인기에 한 몫 했다는 의견이 많다. 원래 소속사에서는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촬영할 예정이었으나, 브리트니가 이를 거부하고 여학생 컨셉으로 촬영한 것이다. 당시 생 신인이던 브리트니의 의견이 신의 한수였던 것이다. 1999년 발매된 데뷔 앨범 '...Baby One More Time'는 각종 기록을 세우며 이례적인 빅 히트를 쳤다. 미국에서만 1,400만 장, 전세계적으로 2,5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엔싱크, 백스트리트 보이즈 등 남자 아이돌 그룹이 판치던 팝계에 브리트니의 등장은 혜성과도 같았다.
그리고 1년 뒤 내놓은 2집 <Oops, I Did It Again!>(2000년)까지 미국에서 1000만 장, 전세계적으로 2000만 장을 판매하는 등 연타석 홈런을 치면서 브리트니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함께 당시 오랫동안 명맥이 끊어져 있었던 솔로 여가수의 시대를 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 10대 솔로 가수 중 가장 높은 판매량, 데뷔 앨범으로는 가장 높은 판매량, 여자 가수로는 가장 높은 첫 주 판매량 등의 각종 기록을 세우 넘사벽의 인기를 구가했다.
1, 2집 때의 브리트니의 앨범은 '자이브 레코드'의 총 프로듀서였던 맥스 마틴(Max Martin)의 색깔이 진하게 드러나는 일종의 '캔디 팝'이었다. 실제 이때의 브리트니의 모습을 보면 섹시하기보다는 귀여운 이미지가 강했고, '귀엽고 춤 잘 추는 풋풋한 이웃집 소녀'의 모습으로 어필했다. '...Baby One More Time'이나 'Oops, I Did It Again!', '(You Drive Me) Crazy'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 이후의 뮤비와는 다르게 분위기나 느낌 등이 크게 다르다. 특히 전자의 경우는 아예 뮤직비디오 배경이 학교.
2번째 싱글인 'Lucky' 같은 작품에선 아예 자신처럼 일찍 성공해 외로운 헐리우드 배우의 비애를 다뤘다. 몬데그린인 "오뤤만에~ 집붸서 바!나!나! 먹었숴"로 유명한 노래.#
2000년 열린 제42회 그래미상에서 최고의 신인상 부문 후보에 올라 참석했다. 하지만 수상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에게 돌아갔다. 크리스티나는 본인이 수상 이후 머라이어캐리와 같은 상을 받아서 기쁘다며 인터뷰를 한 적 있다
2001년 3집 <Britney>부터는 자신의 우상이라는 마돈나의 영향을 받아 점차 섹시 이미지를 추구해 나가기 시작했고 일단 자켓 사진부터 수위가 확 올라간 사진을 사용하며 그 서막을 알렸다. 리드 싱글은 'I'm A Slave 4 U'. 하지만 이런 브리트니의 변화된 모습에 대중들은 적응이 잘 되지 못했던 탓인지 1집이나 2집에 비해서는 그렇게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적이었다는 것이지, 3집 역시 미국에서 500만 장, 전세계적으로 1000만 장 판매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담으로 철창 속에서 호랑이와 함께 온몸에 뱀을 감고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되었던 MTV 뮤직 비디오 어워드 공연 또한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공연은 팝계에서 레전드로 통하는데 역대 VMA 공연들을 통틀어 탑5에 들어가며 브리트니 커리어 통틀어서도 거의 최고의 공연이라 보는 사람도 많다. 브리트니의 외모와 핫한 몸매, 파격적인 의상과 백댄서들, 그리고 격렬한 안무와 실제 동물들까지 동원된 엄청난 공연이었다. 다음 해인 2002년에는 포브스에서 세계 100대 유명인사에 뽑히고 영화 <크로스로드>의 주인공을 맡았으나 크게 말아 먹고 골든 라즈베리를 수상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결별하고 2003년 말 나온 4집은 브리트니 답지 않게 미국에서 300만 장, 전세계적으로 700여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해 전작에 비해 주춤한 듯 보였지만, 그 해 미국에서 8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었다. 일렉트로니카와 트립합 등 다양한 장르들을 실험해보며 음악 세계를 넓혔다. 리드 싱글은 'Me Against the Music'인데 마돈나와 함께 부른 듀엣곡이다. 원래 다른 곡이 듀엣곡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 곡을 들은 마돈나가 즉석에서 이 곡을 듀엣곡으로 하자고 제의했고 스피어스 측도 흔쾌히 OK. 무엇보다 앨범 활동 기간 동안 마돈나랑 키스를 했다. 사실 마돈나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도 키스했는데 묻혔다.
참고로 이 시기 소꿉친구와 결혼식을 올렸으나 55시간 만에 이혼하는 쿨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싱글 Toxic은 브리트니의 유명한 노래 중 하나이다. 소녀 이미지를 벗은 이후 발매한 섹시 컨셉의 노래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흥행했다. 자극적인 뮤직비디오는 물론 X맨을 찾아라 등 예능 프로그램 댄스 배틀에서 수 없이 BGM으로 사용되었기 때문. 평론가들에게도 음악성 또한 인정받았다. 역대급 데뷔를 했는데도 신인상조차 안주던 그래미상에서 'Best Dance Recording'을 수상했다. 참고로 이 당시 수상이 처음이자 마지막 그래미 수상이다... Toxic 이후 발매된 싱글은 발라드 곡인 'Everytime'으로 여러 나라에서 1위를 기록했다.
2004년 11월에는 첫 베스트 앨범 <Greatest Hits: My Prerogative>를 발매, 두 번째 싱글 'Do Somethin''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곡이다. Toxic과 마찬가지로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구장창 틀어주었기 때문.
4집의 상대적 흥행 부진으로 약간의 타격을 받았지만,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팝스타 중 한 명이었고 그녀의 전성기는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시기가 그녀의 최정점이었고, 남자 하나를 잘못 만나 그녀의 인생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사실 브리트니는 이미 4집 전부터 슬슬 잡음이 나오기 시작하던 차였다. 브리트니는 원래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꽤 오랜 커플이었는데, 브리트니가 3집 앨범을 발매한 후 깨지고 만다. 이때 저스틴이 브리트니의 배신을 암시하는 노래를 부르자 브리트니도 맞불을 놓는 등 좀 시끄러웠고[9] 무엇보다 저스틴의 폭로에 의해 혼전순결 서약을 했었던 브리트니가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이미 관계를 맺은 사이라는 것이 알려져, 브리트니는 사랑도 잃고 이미지도 실추[11]되는 이중고를 겪었다. 상술된 MTV 뮤직 어워드에서 마돈나와의 키스 퍼포먼스를 했을 때가 두 사람이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때 카메라가 관중들 속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저스틴의 표정을 재빠르게 클로즈업했는데 표정이 굳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이 때 이후로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새 앨범 활동 때마다 브리트니를 이용한다는 브리트니 팬들의 원성이 잦다. 실제로 3집 컴백 당시 브리트니를 재언급해서 브리트니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고 그해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미국 최다판매앨범 1위를 하고 그래미 4관왕을 하고 브리트니보다 잘 나가서 더욱더 브리트니 팬들의 부러움과 질투심에 찌질남이라 부르기도 한다.
브리트니는 이 당시 섹시한 이미지의 댄스와 노래를 했지만 사적으로는 마마걸스러운 이미지를 내세웠는데 미국에서 이 이미지는 큰 이익이 됐다. 혼전순결 서약과 모든 의견에 어머니를 존중한다는 등 착한 소녀로서의 이미지를 많이 부각시킨 게 특징이었다. 라이벌로 여겨졌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거의 처음부터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았음을 인정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아이돌들에 비해 심히 순수한 이미지를 주장한 바가 없지 않기에 덕분에 '가식 떤다'라는 의견도 나왔었던 때라 마침 터진 저스틴과의 스캔들은 브리트니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이별이 큰 충격이 되었는지 이후의 남자 관계는 계속 꼬이기 시작한다. 2004년 초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과 라스베가스에서 술에 취해 홧김에 결혼했다가 55시간 만에 쿨하게 다시 이혼하기도 했다. 상대 남성 역시 특S급으로 쿨해서, 위자료 청구 소송이나 재산분할 소송 같은 짓을 안 했고, 브리트니는 감사의 뜻으로 스포츠카를 선물했다고 한다.
브리트니는 연골 부상으로 잠시 휴식기를 가지기도 했는데, 이것은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으니... 브리트니는 그해 7월 자신의 인생 최고의 혹 케빈 페더라인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3개월 만에 결혼하게 되었다
케빈 페더라인은 브리트니와 사귄다는 스캔들이 터질 때 이미 동거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하나 있었고, 심지어 그 여자가 케빈의 둘째를 임신 중인 상태였다. 사실상 자녀를 가진 유부남이었던 셈. 어떻게 보면 불륜이라고 할수도있다. 그런 와중에 브리트니와 결혼한다고 나온 거라 세간의 의견은 '브리트니, 그 남자는 안돼!'였다. 그리고 남자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각인되었다. 한편으로는 동거 중인 임신한 여자의 남자를 뺏은 브리트니를 비난하는 여론도 많았다.
전세계의 아이돌이었던 그녀가, 이미 자녀가 있는 백업 댄서와 결혼한다니, 팬이 아니었던 사람들조차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귀담아 들었을리가... 2004년 말 'Do Something''이 수록된 컴필레이션 앨범을 내놓고, 라디오에서 다음 앨범 <The Original Doll>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지만 임신으로 인해 사실상 전면 중단. 그날 KISS FM에서 공개된 곡인 'Mona Lisa'는 재편집되어 Britney & Kevin EP에 수록되었다. <The Original Doll>에서 작업한 데모들은 굉장히 많은데,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중 한 곡인 'Rebellion'은 유명 팝 가수인 Aaliyah에게 영향을 받은 곡이기도 하다.
결혼 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브리트니는 그동안의 화려함은 어디 둔 건지, 체중도 늘고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은 모습으로 파파라치에 유독 많이 찍혔다. 팬들은 이런 브리트니의 모습에 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런 상황은 브리트니가 2005년 9월 첫 아이를 낳자마자, 바로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때 임신 누드 화보를 찍기도 했었지만 간간히 나오는 스캔들 뉴스는 찌라시성을 감안하더라도 두 사람의 결혼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는 '결혼에 매우 만족하며 아이들과 남편을 사랑한다'는 태도를 고수해왔고, 리얼리티 쇼까지 찍으면서 잘 사는가 했더니만, 결국 2006년 9월 둘째를 낳자마자 2개월 만에 이혼했다. 이때 케빈 페더라인이 브리트니에게 문자 메세지로 이별을 통보받고 좌절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 토크쇼인 <The View>에서는 브리트니의 이혼이 알려진 다음날 오프닝에서 빵빠레를 날리며 자기 일처럼 축하(...)해주었다. 아무래도 옆집 동생 같은 친근한 이미지였던 슈퍼스타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은 팬이 아니더라도 미국인 입장에서 착잡했을 것.
그 전부터 페더라인은 브리트니의 돈으로 자신의 앨범을 내기도 했다. 물론 그 앨범은 대중과 평론가 모두에게 최악의 평을 받았다. 평론 종합 사이트인 메타크리틱에서 1집 "Playing with Fire" 평점 15점을 기록하여 역대 최악의 평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자료로 받은 돈을 가지고, 또 다른 여자를 만나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중이다. 아들들의 양육권도 페더라인에게 넘어갔는데, 이는 브리트니의 병크도 한 몫을 했다. 이때 브리트니는 술과 약물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법원에서 양육권을 패더라인에게 넘긴 것이다. 현재 브리트니의 두 아들은 케빈 페더라인의 전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들과 함께 페더라인의 새 여자친구에 의해 양육되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페더라인은 브리트니의 팬들에게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고 있다. 보통 개빈이라고 부른다.
다만 '애 딸린 이혼남 백댄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브리트니 팬들의 시각을 제외하면, 페더라인은 전처에게 충실하지는 않았지만, 브리트니에게 충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이혼 역시 일방적으로 문자로 통보당한 것이었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도 브리트니는 끊임없는 구설수에 올랐으나(대표적으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운전을 했다.) 페더라인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결국 법원에서 자식 양육권을 브리트니에게서 박탈하고 페더라인에게 주었을 정도다. 그리고 말이 동거녀지 애까지 임신하고 있던 여자의 남자를 NTR 해간 브리트니도 별로 떳떳한 입장이라고 보기는 뭐하다.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결혼이었던 셈.
그래도 세월이 약인지 최근에는 둘이 같이 아들의 축구 경기를 보러 오는 모습이 파파라치에 포착되기도 하였다어쨌든 브리트니에게 이혼의 타격은 컸다. 한창 잘 나가던 때 활동을 잠시 중단한 것 자체도 복귀에 차질이 있었는데, 이혼 스트레스로 인하여 몸매가 망가지고 기행을 일삼는 등 엄청난 구설수에 시달렸다. 이미 결혼할 때부터 파파라치의 표적이 되고, 남편과 이혼하고 난 이후부터는 완전히 슈퍼스타의 포스는 온 데 간 데 없고 할리우드의 막장 파티걸의 이미지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2008년 재기에 성공할 때까지 브리트니의 삶은 말 그대로 막장. 한 언론에서는 2007년의 브리트니를 두고 "갈 데까지 간 스타''의 모습을 보여준 극단적인 예라고 표현했다. 이혼, 양육권 박탈, 재활원 입소, 할리우드 막장 파티걸의 삶, 최악의 퍼포먼스까지 모두 1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다.
이 시기 브리트니는 패리스 힐튼, 린제이 로한과 함께 미국의 트러블메이커로 꼽혔다. 이혼한 직후부터 패리스 힐튼과 어울리기 시작했는데, 패리스 힐튼과 어울리기 시작하면 사람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게 되었다. 술과 약물에 취해있는 것은 기본이었고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기행을 실천하셨다. 이혼과 함께 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으면서 재활 센터에 드나들기도 했다.
이 외에도 별의별 기행을 선보였다.살이 찌기도 했고 모여든 파파라치에 화가 난 브리트니가 우산으로 차량을 부수는 행동을 보이며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특히 미용실에 찾아가 스스로 머리를 빡빡 깎아버리기도 하는 등 정서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은 각종 언론에서 뽑은 2007년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 이때 브리트니가 언제 죽을지 알아맞히면 PS3를 준다던 사이트도 있었다.
브리트니는 패리스 힐튼과 '동갑의 유명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별로 없다. 패리스 힐튼은 희대의 또라이 파티광과 냉철한 사업가이자 힐튼 가문의 일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무서운 인물이며, 어렸을 때부터 상속받을 재산이 보장된 삶을 살았다. 반면 브리트니는 성공하기 전까지는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오히려 약간 촌티가 나기까지 하는 남부 출신 연예인 지망생이었다. 브리트니는 10살 전후부터 가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물론 운도 따랐겠지만) 피 나는 노력으로 막대한 부와 명예를 쌓았다. 힐튼은 망해도 부도가 있으니 걱정없이 파티나 하고 이미지 관리나 하면서 사업에 몰두하지만, 브리트니의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편이었다. 브리트니는 자신에게 놓여진 짐이 너무 무거웠고 언제나 자칫 잘못하면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패리스 힐튼은 이런 브리트니의 '불안함'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점차 힐튼과 브리트니의 사이는 점점 벌어지고, 거기에 팬들의 '간언'이 이어지며 현재는 힐튼과 멀어진 상태다. 이 시기에 브리트니는 자신을 10대의 우상처럼 남아있길 바라는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도 없었다고... 오랫동안 함께 해온 매니저 등 가까운 사람의 조언을 거의 듣지 않았기 때문에, 점차 비즈니스적으로도 고립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부모와도 거의 연락도 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막장 짓이 절정에 달했던 2007년에는, 브리트니의 최대 팬사이트였던 WorldOfBritney.com마저 브리트니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며 영구 폐쇄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 속에서 2007년 11월, 5집 <Blackout>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2007년까지 발매된 브리트니의 앨범 중 유일하게 빌보드 1위를 하지 못한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3장의 정규앨범이 모두 1위를 하지 못했다) [14] 미국 내 50만 장, 세계 25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 데뷔 앨범을 미국에서만 1400만 장, 그 다음 앨범을 1000만 장 팔았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기준으로는 그냥 몰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음악성에서는 대호평을 받으며 음악적 감각은 죽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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